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본 1950년대 제주 해녀 문화의 역사적 의미. 4.3 이후 폐허 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여성들이 어떻게 제주 경제를 일으켰는지, 해녀의 출가물질과 경제적 자립의 의미를 심층 분석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글로벌 흥행을 기록하며 1950년대 제주 해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 오애순의 어머니 전광례는 전쟁 피난민에서 해녀가 되어 홀로 세 아이를 키우다 28세 젊은 나이에 숨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인물로, 그 시대 제주 여성들의 고된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히 드라마 속 배경이 아닙니다. 해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이 경제 주체로 활동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며, 특히 1950년대는 제주 해녀가 가정 경제를 넘어 지역 경제 전체를 떠받친 시기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를 통해 재조명된 제주 해녀 문화의 역사적 맥락과 여성 경제활동의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합니다.
1950년대 제주,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1951년생 오애순이 태어난 제주는 완전히 폐허였습니다. 1948년 시작된 4.3 사건으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 사라졌고,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젊은 남성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면서 제주 사회는 노동력 부족과 경제 붕괴라는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1년 초까지 14만 8천여 명의 피난민이 제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절반을 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식량, 집, 학교 모든 것이 부족했고, 육지에서 내려온 피난민과 집이 불타버린 이재민들 사이에 식량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극한의 상황에서 제주 여성들, 특히 해녀들이 가족과 공동체의 생존을 책임졌습니다. 드라마 속 애순의 어머니 광례처럼 많은 여성들이 전쟁미망인이 되었고, "귀신보다 배곯는 자식들이 더 무섭다"는 절박함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해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생존 전략
제주에서 해녀가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해녀이면 딸도 해녀, 시어머니가 해녀이면 며느리도 해녀가 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7-8세부터 바다에서 헤엄을 배우고, 12-13세에 해녀인 어머니로부터 두렁박을 받아 연습을 시작하며, 15-16세가 되면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습니다.
물질은 목숨을 담보로 한 노동이었습니다. 산소공급 장치 없이 수심 10-20미터 바다 속으로 잠수하여 하루 수십 번, 많게는 100번 이상 반복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전복, 소라, 미역을 채취했습니다.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도 4-5시간씩 작업했으며, 임신 중에도 바다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해녀들 사이에는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실제로 반복적인 잠수로 인해 체내에 질소가 과도하게 축적되어 발생하는 감압병, 즉 '숨병'으로 많은 해녀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라마 속 광례가 28세에 숨병으로 사망한 것은 허구가 아닌, 그 시대 해녀들의 실제 현실이었습니다.
여성이 가장이 된 사회, 제주 해녀 경제
1950년대는 제주 해녀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절정기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해녀 수가 1만 4천 명을 넘어섰으며,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가정 경제의 큰 몫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체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구체적인 수치로 보면 그 위력이 더 명확합니다. 1929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 자료에 따르면, 제주 도내에서 활동한 해녀 7,300명은 약 25만 엔의 어획고를 올렸습니다. 반면 육지와 외국으로 출가물질을 나간 해녀는 3,500명으로 도내 해녀의 절반도 안 됐지만, 무려 50만 엔을 벌어들였습니다. 도내 해녀 수의 절반으로 2배의 수익을 올린 것입니다.
이는 당시 남성 가장의 월급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1960년대 한 해녀의 증언에 따르면 "월세가 200원이던 시절 남편의 한 달 월급을 하루 만에 벌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해녀들의 성수기 하루 수입은 30-50만원에 달했으며, 이는 제주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립과 가정 내 발언권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출가물질: 국경을 넘은 여성 노동의 역사
제주 해녀의 경제적 기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출가물질', 즉 바깥물질입니다. 1895년 경상남도로 첫 출가 물질을 떠난 제주 해녀들은 이후 한반도 전역은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출가물질은 1930년대에 정점에 달해 국내외 출가 해녀가 5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부산, 울산에서 시작해 동해안을 따라 청진까지 북상했고, 남해안과 서해안, 울릉도와 독도까지 진출했습니다. 해외로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칭따오와 다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나갔습니다.
특히 독도 어장에서의 활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독도 의용수비대와 울릉도 어민들의 요청으로 매년 수십 명씩 독도에서 미역과 전복을 채취하며 대한민국 영토 수호에 기여했습니다. 마땅한 거처도 없이 가마니를 깔고 얇은 군인 담요를 덮고 자면서도 묵묵히 일했던 제주 해녀들은 독도 영유권 강화의 숨은 주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출가물질은 단순히 개인의 생계 수단을 넘어 제주 경제 영역을 확대한 개척 활동이었으며, 세계 여성 노동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사례입니다.
가부장제 속 여성 경제주체의 모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경제적 능력을 발휘한 제주 여성들은 정작 권리에서는 배제되었습니다. 4.3 재건기와 지역개발기인 1950-1970년대, 제주 여성들은 주요 노동력으로 국가와 가족, 마을의 재건에 기여했지만 반공주의와 경제발전주의, 가부장주의가 중첩되면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지위, 재산 분배 및 상속권, 교육받을 권리에서 배제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애순이 "똑소리 나는" 딸임에도 오빠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가야 했던 것처럼, 당시 제주 여성들에게 '가족'은 희망이자 동시에 희생을 요구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전문가들은 "제주 여성들에게 권리 없이 생계부양의 의무만 부여되었던 점이 차별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면서도 호적에서는 차별받고, 아들 교육을 위해 딸의 꿈을 포기시키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였습니다.
해녀 공동체 문화: 연대와 상호부조
그럼에도 제주 해녀들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은 강력한 여성 공동체 문화에 있었습니다. 해녀들은 물질 실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었지만, 이는 위계가 아닌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상군 해녀들은 오랜 경험으로 암초와 해산물을 가장 잘 알았고, 후배 해녀들에게 지식과 삶의 자세를 전수했습니다.
물질을 나가기 전 모이는 '불턱'은 단순한 탈의 장소가 아니라 해녀들의 소통과 연대의 공간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애순의 어머니 광례와 친구 홍경자가 함께 피난민에서 해녀가 되어 서로를 지탱해주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는 실제 해녀 공동체의 모습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매년 바다의 무사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잠수굿, 영등굿 등의 의례도 공동체 결속을 강화하는 중요한 문화였습니다. 위험한 바다를 대상으로 일하는 만큼 서로의 안전을 보살피고, 능력에 따라 공동작업을 하며 이익을 나누는 상호부조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의 의미
제주 해녀 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전통 어업 기술이 아니라, 산소공급 장치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 문화, 공동체 연대를 강화하는 잠수굿, 모녀 및 세대 간 전승되는 여성 역할 등 복합적인 문화 체계였습니다.
특히 제주해녀문화가 "공동체 내 여성 지위 향상에 기여했고, 생태 친화적 어로 활동과 공동체 어업 관리로 친환경적 지속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반농반어의 전통 생업과 강력한 여성 공동체를 형성하여 남성과 더불어 사회경제와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양성평등의 한 모범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2023년 기준 활동 중인 해녀는 2,839명으로, 이 중 60% 이상이 70세 이상 고령입니다. 1970년 1만4천 명을 웃돌던 해녀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딸에게 승계가 되지 않고 신규 해녀 발굴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 '강인함'의 본질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해녀를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본 실제 제주 출신 시청자는 "어머니가 1화를 보고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했다. 과거를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아픈 기억"이라고 증언했습니다. 4.3을 겪고 해녀로 살았던 1940년대생 제주 여성들에게 그 시절은 지금도 진저리쳐지는 트라우마인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제주 여성의 강인함은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고 강조합니다.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강인해질 수밖에 없었고, 생존을 위해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단순히 '제주 여성의 억척스러움'이나 '모성애'로 포장하는 것은 그들이 겪은 구조적 차별과 고통을 은폐하는 일입니다.
드라마가 진정으로 조명하는 것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으려 했던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애순이 시인을 꿈꾸고, 광례가 딸에게 "물질 하지 말라, 식모살이 하지 마라"고 당부하는 장면은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고자 했던 여성들의 절실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결론: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재조명된 1950년대 제주 해녀 문화는 단순한 향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과 이념 갈등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가족과 공동체의 생존을 책임졌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 교과서입니다.
제주 해녀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이 경제 주체로 활동한 가장 강력한 사례이며, 동시에 가부장제와 경제발전주의 속에서 권리는 박탈당한 채 의무만 짊어져야 했던 모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강인함'을 찬양하는 것을 넘어, 왜 여성들이 그토록 강인해야만 했는지, 그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인식입니다.
드라마 제목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어로 "정말 많이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4.3의 상처를 안고 바다에서 목숨을 걸며 가족을 지켰던 여성들, 국경을 넘어 출가물질을 하며 제주 경제를 일으켰던 해녀들, 권리 없이 의무만 짊어지고도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물려주려 애썼던 어머니들에게, 우리는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제주 해녀 문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으신가요? 단순히 '강인한 제주 여성'의 상징으로만 기억할 것인가요, 아니면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도 생존과 연대의 지혜를 만들어낸 여성 노동의 역사로 기억할 것인가요?
